요한복음 3장 11절~17절 예수와 니고데모 성경 말씀 형이상학적 진리 독서 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 중요합니다.
목차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는 말은 영으로 깨어나서 4차원의 세계를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4차원이 원인이고 3차원이 결과인데 4차원의 세계를 깨닫고 그보다 차원이 낮은 3차원의 인과관계를 도출하고 분별 및 판단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는 받을 수 없는 상태이자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3차원의 현실 육체 덩어리로는 해석이 안되는데 계속 표면적으로 해석하려 하는 어리석은 상태를 말합니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4)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인자는 사람인 자 아들 자자로 사람한테서 깨어나야 될 하느님의 아들을 말합니다. 즉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을 깨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안에 들어간 하느님의 아들 즉 인자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즉 하느님과 동체이며 한 분이고 내 안에서 깨어날 욕망과 상상력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인간 아담은 자신이 하느님인지 모르고 현실에서 아담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나로 들어와서 살아주는 그 인식 즉 내가 하느님인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진짜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반드시 태어나야 될 인자 그리스도 존재 의식이 깨어나게 됐을 때 상상력이 태동 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는 그 이름 석 자를 믿는 게 아니라 그 본질을 완벽하게 내 인식과 합체를 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내 인식이 깨어나서 도저히 현실에 반응하지 않고 나는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상력 그 자체였다는 것까지 완벽하게 내 영적으로 각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태어났다 죽는 고깃덩어리 한계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인식의 세계에 영생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영생은 의식이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확장해서 내가 인식하는 그것보다 그다음의 인식으로 점점 깨어나는 무한 인식의 폭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적 살아있음이고 그러한 영생을 내가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의식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의식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인식이고 그 인식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봐내는 소망의 성취이고 그것을 창조할 수밖에 없는 창조의 권한이고 그래서 현실은 계속 바뀌는데 그 영생은 바로 그 뜻입니다. 시공간 3차원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산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시공간에 투영되기 전에 영혼의 세계에서 이미 영존하고 현존하는 그 인식 주체임을 내가 인식한 상태로 깨어난다는 말입니다.
17. 하느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5)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말씀대로 하느님은 현실에 있는 천하 만물들한테 어떤 그 벌도 내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면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창조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즉 절대 빛이 투사가 돼서 현실 스크린에 투영물을 만들고 의식이 빛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의 근원이 투영된 어떤 물질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천 및 원인과 같은 인식의 필름이 없으면 그것이 투사된 투영 물 조차도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이 투영 물은 시공간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절대 인식의 영원성이 결여되어 진정한 투영 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내 안에 있는 아들의 영으로 하느님의 본체 의식이 깨어나서 내 인식이 창조의 권능임을 나로 알게 하고 깨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하느님과 동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낸 다는 말은 상상이 현실을 창조하는데 우리가 상상하게 되면 상상력은 어느 순간 욕망의 대상 목적에 푹 들어가 하나가 되어 그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상상력의 창조는 안식일을 통해 현실에 투영됩니다. 이것을 세상에 보내진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비슷한 말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도 이면을 잘 보아야 합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해 줄 의사가 필요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치료를 해줄 의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어둠을 비추기 위해서 빛이 필요하듯이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내 현재 상황 그리고 상태 오감의 증거들이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얽매여 있는 의식을 죄인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 인간 육체 덩어리에게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은 절대 빛이 네 인식이고 나는 영원한 하느님과 동체이며 현존의 자각이고 내 존재의 의식이 지금 있는 것들을 만드는 모든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 주체로 깨어나게 되는 선물을 주고자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어둠 가운데 빛이 들어오고 빛 자체가 어둠을 밝히게 되면 더 이상 현실은 그 두려움과 어떤 속박됨과 근심 걱정의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만들듯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빚어내는 예술의 장이 되는 겁니다. 이는 하느님 스스로의 언약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어둠이 없이 어떻게 빛이 존재할까요? 인간은 인식 그 자체인데 이 인식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인식의 반대 개념에서 넘어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하느님이 창조물 안으로 들어오듯이 한번은 내가 수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네빌 고다드의 라디오 강의를 깊게 보시면 더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느님이 왜 굳이 아담이 되어 주셨는지 절대 빛이신 하느님이 굳이 어둠을 만들고 그곳에 들어가셔서 다시 어둠 가운데 빛으로 깨어나려고 하시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